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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남장로고, 테이트·전컨·레이놀드 포함 7명 파송
'7인의 선발대' 전남서 복음전파·의료선교에 전념
잉골드, 전주서 포사이트와 협력…병자 돌봄 사역 힘써
조선반도를 향하는 “7인의 선발대”
광주 선교의 시작을 열었던 유진벨 선교사는 남장로교회 소속으로 1895년 4월에 제물포로 입국했고, 뒤이어 오웬 선교사가 1898년 11월 6일에 입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앞선 1892년 8월 미국남장로교에서는 테이트와 레이놀드, 그리고 전킨을 한국 초대 선교사로 선정했고, 여기에 4명의 여성을 포함하여 조선으로 떠나보내는 미국남장로교로써는 대단한 선교적 모험이 시도되었다.
4명의 여성은 테이트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Miss Mattie Tate, 최마태),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전킨의 부인 레이번(Mary Leyburn), 그리고 레이놀드의 부인 볼링(Patsy Bolling)이었다. 이들을 가리켜 “7인의 선발대”라고 부른다.
7인의 선발대는 1892년 9월 7일 미국을 출발하여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는 1892년 10월 18일, 나머지 6인은 11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미국 남장로교 주도의 호남 선교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892년 국외정세 프랑스에서 근대 올림픽 제안, 조선은 동학운동 조짐
1892년 11월 25일 프랑스에서는 교육자였던 쿠베르탱에 의해 근대 올림픽 대회 개최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던 해였다. 이후 4년만인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최초의 근대 올림픽이 열렸다. 국가를 대표하는 것보다는 우연한 여행길에 참가한 사람이 있는 등 허술했지만 한반도 밖의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1891년 고종 2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화폐조례인 ‘신식화폐조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선땅에서 처음 맞이하는 11월은 제법 쌀쌀한 날씨와 낯선 환경, 언어훈련의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인들의 성내거주 불허 등으로 쉽게 서울 지경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음해인 1893년 1월 28일 북장로교 선교사 빈톤(Dr. Vinton)의 집에서 열린 미국장로교파 선교사들의「장로교 미션 공의회」에서 예양협정(禮讓協定 : Commity Agreements)을 통해 한국 선교정책의 기본원리로 네비우스 방법을 한반도 선교 정책으로 공식 채택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호남은 남장로교의 선교 영역이 되었다. 1893년 5월은 남장로교 선교회가 5만 인구의 전주를 기점으로 복음전파와의료봉사라는 두가지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의 마음을 노크했다.
7인의 선발대, 안타까운 희생 잇따라
1894년 2월, 맹위를 떨치고 있는 추위를 무릅쓰고 테이트 목사와 그의 누이동생 테이트(Miss Mattie Tate)를 전주에 파견했고, 그들은 전주에 도착하여 초가집에 머물면서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계획으로 밤을 지세웠다. 외국인 남매가 한 집에 산다는 것이 당시 척외사상(斥外思想)과 사대주의로 팽배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케 했다. 사람들은 몽둥이로 테이트 목사 남매가 거처하는 집의 대문을 부수거나 위협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들 남매는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1892년부터 전북 고부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던 동학의 움직임이 끝내 1894년 동학운동으로 확산됐다. 두 남매는 서울로 철수했지만 동학운동이 끝난 1895년 2월부터 다시금 완산 언덕에 대지와 2채의 초가집을 추가 매입했다. 그러던중 1896년 11월이었다. 밤이면 칠흑같이 어두웠을 조선의 하늘아래 쌀쌀해지는 날씨는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맹위를 떨쳐갔지만 어느덧 한반도 도착이래 4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는 시련이 그들을 기다렸다. 1903년 리네 데이비스 해리슨 선교사(Miss Linnie F. Davis 1858~1903)가 전주 예수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던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5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7인의 선발대 중에서는 가장 먼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후, 전킨 목사는 1908년에 폐렴으로 전주에서 사망했다.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하는 희생이 잇따랐다.
최초 의료선교사인 마티 잉골드(Dr. Mattie B. Ingold)
최초 의료선교사인 마티 잉골드(Dr. Mattie B. Ingold)가 전주 성문밖에 도착한 것이 1897년 11월이었다. 그녀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귀재였고, 5년간의 준비 끝에 100여호 남짓의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어촌이었던 군산을 지나 전주에 도착했다. 1년 동안 의료활동과 관련된 모든 준비를 끝내고 1898년 11월 3일 진료소를 개원했다. 바로 전주 예수병원의 기원이다.
잉골드가 만난 환자들은 육신이 아픈 이들도 많았지만 당시 전주 지역에 팽배해있던 미신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도 컸다. 앞호에서도 소개됐지만 영양실조에 걸린 쇠약한 어린아이가 아픈 이유를 아이가 태어 난지 세이레(21일)가 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개를 죽였기 때문이라든지, 어린아이의 머리털을 버리면 그 아이가 죽어서 뱀이 된다든지, 한 여성은 자기 병에 대해서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하는 이유를 크게 이야기해서 귀신이 들으면 병을 더 나빠지게 만든다는 등이었다. 한국인들은 도처에서 귀신의 공포에 시달렸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복음’이 들어가자 공포가 사라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포사이트와 함께 의료분야에서 눈부신 활동
잉골드는 1904년 포사이트가 제 2대 원장으로 있던 해부터 시작하여 1925년까지 전주에서 활동했다.
1905년 한 해동안 잉골드와 포사이트 협진으로 6,000명을 치료했다는 기록도 있다. 1904년 8월 10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불리워졌던 포사이트가 군산에 도착해 전주 예수병원에서 첫 사역을 시작 했지만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
말골(당시 동학혁명이 발발했던 말목장터 근방)마을에서 무장한 괴한들에게 습격 납치되어 귀가 잘리고 측두골이 깨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포사이트는 후유증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l908년 목포로 다시 파송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정치적 위해와 한반도를 놓고 패권을 다투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이라는 주변 강대국의 정치적 야욕이 한반도에 검은 구름처럼 드리워져 있었던 시기였다.
하늘이 맺어준 만남 테이트(Lewis B. Tate)와 잉골드(Dr. Mattie B. Ingold)
헌신적인 희생과 조건없는 섬김은 희망의 불꽃이 되어 기독교의 저변을 흐르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의 성경구절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들이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의 막이 끝나면 새로운 도전과 막다른 골목이 그들을 기다렸다.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제국주의의 침탈과 국내 정치의 불안 속에서도 평범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새롭게 돋아나는 삶의 불꽃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처럼 연결되어 있었지만 당시 기독교가 이 땅에 남긴 유산은 ‘평등’, 즉 하늘이 인생에게 부여한 공평한 기회에 대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것이었다.
1903년, 군산에서 활동하던 전킨의 건강이 좋지 않자 1904년 5월 예수병원은 포사이드(보위렴) 선교사가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05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인 9월에 잉골드는 7인의 선발대로 한반도에 와있던 테이트(Lewis B. Tate)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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