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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姜元求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
요즈음 여수박람회를 찾는 중국인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전국 전체적으로 보면 광주 전남에 중국인 관광객이 미미하지만, 그래도 많은 관광객이 동구 불로동 정율성 생가를 찾고 있다.
광주에는 볼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어쩌면 정율성생가가 돋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곳에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정율성선생의 비석에 기념사진이라도 찍기 위해 많이 모여들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정율성선생은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되었다. 생전에 고향을 그리워하였지만 오지 못하고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를 부르는 그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정율성선생은 1914년 불로동 히딩크호텔 자리에서 태어난 후 능주초등학교, 숭일학교, 전주신흥중학교를 다녔으며, 1933년 그의 형 정의은을 따라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러시아의 음악가 ‘크리노와’로부터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게 되었다.
내가 20년전 중국에 갔을 때, 인민해방군가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 때 “저 노래를 작곡한 분이 한국인이다”라고 말하자 깜짝 놀랐다. 중국인들은 정율성선생이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그 뒤 심양 조선족중학교에서 민족축제가 열릴 때 인민해방군가가 울려 퍼지자 “이 곡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신 정율성선생이 작곡한 노래입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정율성선생에 대하여 말하면, 젊은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고 있었다. 우리 동포들은 정율성선생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도 확실했다.
그는 남경에서 생활하다 민족주의자인 장지락(張志樂)에 의해 연안으로 가게 되었으며, 중국혁명 성지인 그곳에서 ‘연안송(延安頌)’과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하였다.
당시 험난한 만리장정(萬里長征) 끝에 연안에 근거지를 마련한 중국 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해야 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바로 ‘연안송’을 부르며 전국 각지에서 연안으로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주덕(朱德)을 만났는데 둘째 형 정충룡이 곤명시에 있는 육군강무학교를 같이 다녔다하여 더욱 친하게 대했다고 한다. 강무학교 출신으로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범석장군이 있고, 1955년 7월부터 1958년 3월까지 북한 내각부총리, 1958년 3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북한의 제2대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역임한 최용건(崔庸健)도 이범석장군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금년 8월 하남성 정주(鄭州)에서 ‘정율성음악제’가 열리고, 10월에는 광주에서 하남성 예술단이 열리게 된다. 그는 음악가이자 항일 독립투사로 치열하게 살다간 그의 62년 생애와 음악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하얼빈기념관에 진열되었다.
하얼빈 전시관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한국에서 찾아오는 관람객들은 그의 삶이 주는 의미를 되새기며 그가 한중 두 나라를 잇는 다리가 되기를 기대하는 글들이 방명록에 남겼다.
기념관에 진열된 200여점의 자료 중 첫 부분은 정율성이 1933년 의열단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던, 셋째형을 따라 중국에 와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가던 모습들이다.
2층 전시관에는 그가 본격적으로 혁명에 뛰어들게 되는 중국 공산혁명의 근거지 연안의 험준한 산악지대와 그 속에서 정설송(丁雪松)과 사랑을 키워가며 창작과 연주에 몰두하던 낭만적인 모습들을 재현해 놓았다.
당시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은 백성들의 입을 통해 전국으로 널리 퍼져나갔고, 군인들의 사기를 드높인ꡐ팔로군행진곡ꡑ은 1988년 등소평(鄧小平)에 의해ꡐ중국인민해방군가ꡑ로 확정됐다.
광주는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정율성선생에 대해 내세울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정율성선생을 알리는 일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07년 북경, 2008년 남창, 2010년 상해, 2011년에는 하얼빈에서 정율성음악제가 개최되었다. 무엇보다 정율성 음악제도 계속하면서,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여 기념관도 짓는 것이 한중문화교류를 위해서도 좋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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